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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s bible study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요한복음 6:16~33]

by Pee_Jay 2024. 11. 23.

요한복음에서 바라보는 물 위를 걷는 예수님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저물고', '어두웠다' 그리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이는 예수님의 부재 속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상황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요소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맑고 화창한 날씨는 대체로 밝은 상황 혹은 사람에게 행복한 상황을 부여한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 6장 16절~17절에서 어두운 상황의 묘사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파도는 실제 파도이기도 하면서 제자들의 마음속에 일렁이는 파도이기도 하다.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실제 '십여 리'는 30 스타디온이다. 30 스타디온의 거리는 대략 5~6km 정도가 된다. 여기서 바다는 갈릴리 호수이다. 갈릴리 호수는 남북으로 약 21km이고 가로로 12km 정도 되는 크기이다. 즉 십여 리는 5~6km라는 거리이고 대략 제자들이 호수의 반쯤 와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바다 한가운데까지 예수님이 걸어서 온다는 것을 가지고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보며 성경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바다 위를 걷는 존재를 창조주로 표상한다. [ 욥기 9: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

 또한 바다는 예로부터 그 밑인 끝을 알 수 없는 혼돈의 세계로 인식되곤 했다. 이러한 바다 위를 걷고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 셨고 바다가 극복되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스도께서 파도를 극복하고 오는 것은 예수가 누구신지 증언하는 말이다.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내니''나는 나다(=에고 에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존재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기뻐서 배로 영접하는 요한복음과 달리 공관복음서에서는 물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한다.

[ 마태복음 14: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

 

 그리고 두려워하던 이들 중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어본 뒤 물 위를 잠시 걷게 된다. 하지만 물 위에 있던 그는 곧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어쩌면 마음에도 무거움이 있는 것이 아닐까? 

 

 베드로가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주었을 때 그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물 위를 걸어가다가 두려움과 다른 생각이 덮쳐왔고 베드로는 물에 빠지게 된다. 일상에서 주님께 내 마음 내 생각을 내어놓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공관복음에서는 이러한 베드로 개인의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나다'라고 하시는 분이 오실 때 기뻐 영접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근원적 기쁨에 대해서 보여준다. 요한복음은 시종일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한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많은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고 예수님을 빼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뭍에 남아있을 예수님이 안 계신다!! 이와 같은 상황을 한 번 더 표현함으로 예수님께서 분명 물 위를 걸어가셨음을 반복하여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와 같은 질문에 예수님은 26절에서 다음과 같은 동문서답을 하는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찾아온 이들의 속은 바로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표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표적을 따르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따르겠다는 고백이다.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는 이러하나 따름이 아닌 그저 떡을 먹고 배부른 상황을 좇은 것일 뿐이었다

 

 즉, 예수님을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지 병과 배고픔에 해방해 주는 존재로서만 인식한다

 

 많은 사람이 곤란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믿음을 시작한다. 하지만 우린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 거기서 만족하고 그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을 만나야 한다. 곤경을 통해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깊은 신앙의 여정에 들어가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도 맞지만 이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접속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가 일어나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의 문제만 몰두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문제를 넘어 하나님의 세계로 초대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애타며 바라보는 것들을 내 이야기가 아닌 이상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본다. 그것이 바로 핵심을 만나지 못하고 주님과의 마음의 일치가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이들에게 예수님은 덧붙여 27절과 같이 말하는데 다음과 같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

 

 27절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먹고 사는 일을 통틀어 썩을 양식이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잘못 받아들이면 게으름과 나태함의 정당화가 되어 무능력한 삶으로 이어진다

 썩을 양식은 단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지만 지속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한다. 요한복음에서 지속되는 영생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보람이라는 단어가 잘 나타낸다고 한다. '보람'누군가의 필요에 대해서 나 자신을 선물로 줄 때 나온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우리를 위해서 선물로 내주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을 위한 양식이다.

 

 

 무엇을 먹고 살지 집중만 하다가 내 옆에 누군가의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인치신 자니 즉 그리스도의 삶이야말로 바로 하나님 마음의 합한 삶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한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무슨 음식으로 뭘 만드는가를 가르쳐주면 당신이 누군지를 안다'

 

 

음식을 먹고 비계와 똥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일과 좋은 유머를 만드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일과 좋은 유머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삶이 중간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날마다 먹고 살아가며 그 먹은 에너지를 무엇으로 만들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으로 무엇에 집중하냐는 하나님의 영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동참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도울 때 우리가 스스로 가서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마음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바로 할 일이다. 예수님에게 내 삶을 온전히 맡기고 그분의 처분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이다. 즉 '내가 믿는다는 것'은 나를 온전히 주님에게 맡기고 어떻게 쓰이든 감사한 것이다. 보내신 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핵심을 붙드는 것이고 그다음에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주여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닌 나를 맡기고 주님이 나를 움직여 이용하셔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나를 바치는 것이다.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28~29절까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30절에서 또 되묻는다. 그리고 그들은 방금 전(요한복음 6장 16절 내용 이전)에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옛날 만나를 주신 이야기를 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기적이 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만나를 주신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실제로 믿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지닌채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한다.

 

믿으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많은데 사실 깨달을 생각조차 가지지 않는다. 늘 예수님을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만나 이야기를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선물로 오셔서 모든 이들에 선물이 되었던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