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2절 말씀속에서 우리도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힘들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상대의 말을 의미있게 인정하며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늘 상대방에 아래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판단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더욱 더 경청의 태도가 필요하다.
52절을 보면 [살을 먹는다 / 피를 먹는다] 이에 대해서 단순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보인다. 성경 속 이들이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과 왔을 때 박해의 요인이었다. 첫 번째로는 제사를 못 지내게 하는 것에 대한 박해요인 / 그리고 두 번째는 조선초기 영아들이 납치되었을때 이 구절로부터 생긴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예수님 당시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면 당시에 로마에서는 미트라라는 종교가 군인 사이에 퍼져 있었다. '미트라'는 우주의 황소를 죽이고 피를 뿌리면 생명이 창조된다고 생각했다. 로마 군인들을 늘 전쟁의 죽음 앞에 있기에 이런 종교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시대적인 오해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이 오해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트라 종교에서와 같은 피가 아닌 유월절 어린 양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12장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4.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25.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즉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양. 즉, 구원자라는 의미인데 사람들은 미트라 종교와 연관시켜 생각을 한다.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성경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이 구절은 많이 익숙한 구절이다.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기 직전인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하신 말씀과 유사하다.
요한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 장면이 이와같이 삽입되어 있다. 살과 피라는 표현은 기독교에 성찬식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가톨릭과 기독교는 각각 성찬에 대해서 다르게 받아들인다. 가톨릭에서는 사제가 기도를 하는 순간 떡과 포도주가 성체로 바뀐다. 이것을 화체설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떡과 포도주를 남긴다거나 버리는 등의 소홀히 대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미가 강하다.
'살을 먹는다 내 피를 마신다' 라는 표현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 쉽게 비유하면 선생님이 강단에서 강의를 한다. 그리고 학생은 강의를 듣는다. 강의를 들은 학생은 강의자의 살과 피를 먹은거다. 누군가의 생각이 전달되어 한 사람 속에서 일을 한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는 말씀이 삶에 적용된다면 이것이 바로 피와 살이 된다는 것이다.
즉 말씀이 삶으로 인격화 되는 것,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의 인격화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다니지만 교인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대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삶이 영생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어 이미 예수님처럼 살아가려 할때 나는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도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 속에 있는 쓸쓸함이 사라진다. 하나님께 받는 가장 큰 은혜는 우리같은 죄인이 용서로 받는 것과 더불어 우리를 하나님의 거처이자 손발로 삼아주시어 일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하시는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는 이러한 말이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이야기 하신다. 산다는 것은 주님과 언약 안에 머물면서 삶을 살아감을 말한다. 우리 각자의 삶에는 주인이 많다. 그 주인은 돈, 출세, 명예, 권세 등등... 다양하다. 우리가 이들을 주인으로 삼으면 우린 자유할 수 없다. 하지만 돈, 출세 등을 주인 삼지 아니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서 주님 안에 있을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라는 고백이 절실하다.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을 붙들어 나가야 한다.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떡과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만나)를 비교한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분하는 대목이다. 이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 거하는 자이다.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주님이 말씀하신 삶을 살면 진정한 자유가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삶의 총체적 변화, 재구성이 필요하다.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율법적으로 사는 것이 아닌 나의 내면이 예수 그리스도로 변해야하는 것이다. 인격의 변화와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와 살을 주신 것처럼 자기를 타인에게 선물로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것에 대해 따라다니던 제자들조차 남감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떠난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가난한 삶에 들어가 그들의 아픔을 어루어 만지는 삶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삶이 아니다. 다. 제자들조차 이는 난감하기에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난다.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수군거림'은 집단의 논리를 서로 서로 수근대며 강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현대인들 평범한 사람들의 특색 3가지를 말한다. 하나. 천박한 호기심 / 둘. 수군거림(깊은 의식에 가지 못하고 남들의 말을 듣는 것) /셋. 평균적 일상성 (남들이 누리는것 나도 누려야해! )
이에 예수님께서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리느냐고 하신다. 주님의 말씀이 너무 어렵기에 사람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이 나온다.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올라가는 것 이것은 영광을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책 어린왕자에서 어린왕자는 지구에 온다. 그리고 자기의 별로 가기 위해 사막에서 만난 뱀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자 뱀은 어린왕자를 문다. 그리고나서 어린왕자는 자기의 별로 돌아간다. 여기서 올라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올라간다', '돌아간다' 하는 것은 사명을 완성할 때와 영광을 받으실 때를 의미한다.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육이 무익하다'는 말은 '행함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유대적인 가르침에서 율법을 행하거나 혹은 일상에서 어느 대학을 나왔고 어디 출신이다.. 이런 것은 모두 육의 속한 것이고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정말 중요하는 것은 내 영이 지향하는 바이다. 우리를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은 인격의 지향과 무게, 태도에 달려있다. 결국 내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 지가 중요하다.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유다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중에는 처음부터 믿지 않고 예수님을 팔 수도 있는자가 있었다. 즉, 자기부정을 하지 못하는 모든 제자를 말한다. 예수님을 내면화하는 것이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믿음은 곧, 예수님과 영적인 깊은 일치를 말한다. 이런 면에서 교회를 다니지만 제자가 아닌 자들이 많다.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깊은 영적교감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박수치는 것이 아닌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한다. 이에 대해 많은 제자들이 어려워요~ 하면서 떠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린다.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열두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도 가려느냐...' 말 속에서는 씁쓸함이 느껴진다. 믿음이라는 것은 결단이다.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닌 모험이다. 잔잔한 바다가 아닌 풍랑이 치는 바다로 나서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말이다.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공관복음에서 베드로가 고백한다. (막 8:29 , 마16:16)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모두에 나온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베드로의 말을 단순히 보기보다는 자세히 봐야한다. '믿고 알았다!!' 알기에 믿는 것일 수도 있지만 믿기에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왜 나를 버리셨냐'고 한다. 버림받음에 대한 고통이다.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내 영혼을 맡긴다'고 한다.
하나님의 계획이 나보다 크다는 것을 알기에 맡기는 것이다. 절대적 신뢰 속에 맡기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이 두 가지를 의미한다. 알았기에 믿는 것이 아닌 절대적 신뢰로 믿었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계산해서 '어?! 투자해 볼만 해' 하는 계산적 관계가 아니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마귀라고 하는 말은 그사람이 마귀가 아닌 마귀의 하수인이라고 하는것이다. 분명히 세상에는 이런존재가 있다. 그리고 유다보고 성경에서 '예수를 팔 자러라'라고 한다. 이 말씀에 시제는 특별하다. 단수 미완료 시제(헬라어)로 '유다가 우발적으로 한 것이 아닌 배신의 마음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 성서학당 공부 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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